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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냥의 서글픈 해프닝 (잡아 오라는 꿩은 못 잡고 "이"만 잡아 온 이야기) 금렵(1972년 4월)전,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서울도 심했지만 시골은 여름엔 빈대가, 겨울엔 이가 더 극성을 부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집에 목욕탕이 있는 집은 거의 없어 겨울에 공중목욕탕은 구정 전에만 겨우 한 번 갈까 말까하는, 또 머리는 1~2주일에 한 번은 매우 자주 감는 것이요, 보통 한달만에 감았으니 어 떻겠는가? 아니, 한두 달이 넘게 또 겨울 내내 목욕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은 애들도 많았다. 더욱이 시골은 공중목욕탕도 군청소재지나 가야 있었기 때문에 더 엄두를 못 내었다. 또 집에서는 물을 데울 땔감을 아끼느라(너무 못 살아서) 감히 자주 목욕이나 머리를 감을 수가 없었 다. 따라서 남자보다 여자들에겐 머리에 서캐("이"의 알)나 "이"가 들끓어 자주 참빗으로 훑어서 잡곤 했으니 물론 속옷엔 "이"가 들끓게 마련이었다. 이 "이"는 점점 생활이 나아져 목욕문화가 발달되면서, 또 "빈대"는 산림녹화로 연탄을 쓰기 시작하면 서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요사이 젊은 분들은 "이"나 "빈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것이다. 하여튼 "이"가 끼면 가려워 미치고 빈대에 물리면 지금 모기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괴로우니 그 시 절은 참으로 살기 힘든 나날이었다. 또 시골은 너무도 양식이 부족해 입을 줄이기 위해 딸들을 서울로 식모살이로 보내 밥만 실컷 먹게 해주고 시집만 보내 주면 된다고 하여 사냥차에 꽤 여러 번 데려온 적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니(1965년 1인당 국민소득 76$이었음, 북한은 195$) 식당이나 약국, 병원은 군청 소재지 밖에 없었고 그 땐 버너나 보온밥통이 없어서 사냥꾼들은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괴로웠 다.(석유버너나 보온밥통은 71~2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음.) 10, 11월이나 2, 3월(1960년대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엽기)은 그래도 따듯하여 떡이나 빵, 도시락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나 12, 1월 너무 추울 때는 고통이었다. 선친께선 항상 시골서 올라오는 환자들을 극진히 대해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겐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주셨으며 또 12월 중순에는 늘 환자기록부에 올라 있는 사람에겐 달력을 보내 주셨다. 그 때에는 워낙 달력이 귀한 시절이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여름엔 낚시 잘된다고 편지도 해 주고 겨울엔 꿩이 많이 내려온다고 연락이 와 늘 즐겁게 낚시와 사냥을 즐기셨다. 또 모르는 고장에 가면 면사무소 뒷산에 오르셔서 어떤 집이 제일 잘 사는가 하고 내려다보시고 저 양옥집으로, 없으면 이 함석지붕이 있는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 집에 가시면, 선친께서 "이리 오너라!" 아니면 내가, "계십니까?"하여 그집 가장을 불러 사랑채든 방이든 들어가서 서로 맞절을 하시면서 "서울서 내려온 박 아무개 옳습니다. 이 댁이 이 동네에선 일 유족하단 말씀을 듣고 점심 한 끼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그 쪽에선 "어이구, 별 말씀을요. 그나저나 찬이 없어서 어떻게 하지요?" 이렇게 수인사가 끝난 후 군불을 때고 준비하다 보면 1시간 이상 흐른다. 또 식사가 끝나고 돈을 지불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받는다. 그래서 늘 밥그릇 밑에 몰래 돈을 놓고 오거나 주인집 애들이 있으면 학용품을 사라고 주면 마지못해 받곤 했다. 1967년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서 꿩이 많다고 편지가 왔다. 2월인데 아직도 들판에 벌겋게 내려온단다. 꿩이 2월에 벌겋게 내려온다는데 가지 않을 포수가 어디 있나? 그 주말 바로 선친을 뫼시고 초대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사냥을 시작했는데 봄철이라 꿩이 너무 약아 사정거리 전에 미리 다 나르니 꿩만 실컷 구경하고 한 번도 제대로 불질도 못하고 헤매다 주인집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다 아픈 환자들이다. 서울서 유명한 명의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 20리 환자들이 다 모인 것이다. 그런데 선친께선 하나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시고 일일이 환자를 다 돌보시는 것이다. 가져오신 비상 침으로 조치를 하시고 약이 필요한 환자는 일일이 메모를 하시어 약을 지어 내려 보낸 다고 약속을 하시는 거였다. 그것도 무료로..... 그 동안 나는 밥을 짓느라고 군불을 따듯하게 땐 방바닥에 앉았다가 좀 피곤하기도 해 옆으로 쓰러져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밥을 먹으라고 깨우는데 환자들은 다 가고 없다. 그 때 그 큰 밥주발에 얼마나 수북히 올렸는지 밥을 흘리지 않고 먹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또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 1/3이상을 남겼다. 무슨 젊은 양반이 반도 못 드느냐고 핀잔을 들어가면서..... 지금 그 양을 따지자면 요새 우리가 먹는 밥공기보다도 한 5배 이상은 되리라고 본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니 꿩을 잡아야겠는데 사냥 길에 내려가는 데는 괜찮으나 올라가는 데는 좀처 럼 움직이기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너무도 힘들어 개만 믿고 멜방 총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가는데 느닷없이 내 발 앞에서, 꽈드등! 꺼겅! 꺼겅! 껑!" 하면서 선달님(장끼)이 힘차게 솟아오르는데 너무도 다급하니 총이 벗겨지 지 않아 유효사거리가 다 지나서야 겨냥을 하게 되었으니..... 쏠 수가 있나? "야! 이 형편없는 똥개 놈아! 넌 뭐하고 있었냐? 으이그! 냄새라도 달았으면 잡는 건데..." 사실 개한테 핑계를 댔지만 포인(pointing)을 받았어도 잡을 확률은 별로 없었다. 그 땐 왕초보 땡포 시절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날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고 귀가를 했다. 목욕을 끝내고 선친을 모시고 반주에다 맛있는 저녁을 마친 후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옆에 고이 주 무시던 아내가 꽥 소리를 지르면서 깨운다. "어머! 어머머! 이게 뭐야? 당신 빨리 일어나 봐요!" "왜 그래~애~??? 졸~려 죽겠는데..." "어머머! 빨리! 빨리요!" "왜 또~? 으이그! 신경질 나게!!!" 어~! 어이구! 이런!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깨끗한 흰 요 위에 커다란 보리 톨 만한 시커먼 "이"가 슬슬 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빨리 잡지 못해요? 잡으라는 꿩은 못 잡고 이딴 "이"나 잡아 오고... 자알 하는 짓입니다요!" 자기는 6.25동란 초등학교 때나 봤지, 처음 본다면서 너무도 징그럽고 근질거려 혼났답니다. 땡포라 당할 수밖에 없는 수모라기보다 그 때 현실이 너무 비참했지요. 그 후 아내에게서 내가 사냥을 떠나려면 항상 점심 들 때 절대로 시골집에서 누워 자지 말라는 소리를 무척 오랫동안 들어야만 했습니다. “어! "이" 이야기를 하니 옛날생각이 나 자꾸 근질거려지네 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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