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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라운드도 "케미"의 승리였다. 우리 개가 수색하더니 밭에서 산으로 올라가길 래, 늘 하던 대로 휘파람을 불며 싸인(sign)을 보내고, 동수 군에게 꿩을 몰고 내려오다 "파피"하고 마주치면 꿩이 뒤로 빠져 이리 날라 올지 모르니 이 자리 서 준비하라 해 놓고 냅다 다음 골짜기로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뛰니까 "파피"는 나를 따라 오다가 내 앞으로 쭉~ 나가니 우리 개와 그개 사이에서 묵은 장끼가 미리 날라 뒤로 빠져 동수군 쪽으로 날랐다. 어! 그런데 총소리가 없다. 내가 화가 나 어찌 된 거냐고 물으니 동수군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개가 어떻게 꿩을 몰아주느냐? 형님도 거짓말도 참 잘하는구나!"하고 생각하고 담배를 물고 딴전을 피우다 그 좋은 꿩을 쏘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떻든 간에 그 후 우리 "케미"가 신당 총포나 서부 총포에서는 부동의 톱 명견의 자리를 지켰다. 하여튼 "케미"가 명견이란 소문이 나자 접을 붙이자는 요구가 많아 암놈 좋은 것만 골라 해주었더니 강아지가 자꾸 생기게 되어 동생, 노한성, 고 김건철 선배님 등등께 드렸다. 따라서 양 총포사에서는 엽견(사냥개)들이 거의 다 잉글리쉬 세타 판이 되다시피 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선배 노엽사님 개와 공렵할 때가 제일 많았는데 자기 새끼인줄 아는지는 몰라도 잘도 데리고 다녔다. 새끼도 아비를 닮아 옷도 똑같이 입고(털과 맵시가 거의 같다는 말) 겁도 많아 개울을 못 건너고 낑 낑 대며 왔다 갔다 하므로 우리"케미"가 좀 더 얕은 곳으로 데리고 가 건너오는 시늉을 여러 번 왕복 해도 안 건너오니까 다시 철벅철벅 물탕을 튀기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쉽다는 모습을 보이니 천천 히 건너오는 거였다.
더욱이 7년차가 되니 주인 말을 알아듣는지, 저녁사냥이 끝날 즈음 나와 노 선배님과 저수지 한가운 데 있는 것이 혹시 오리가 아니냐고 얘기하는 것을 듣더니 훌쩍 물로 뛰어 들어가 6~70m를 헤엄쳐 가더니 오리가 아니고 말뚝이라고 자기 턱으로 말뚝을 툭툭 건드려 보고 돌아서서 나오는 모습은 지 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개도 나이가 먹으면 어쩔 수 없는 듯 "케미"가 10살이 되니 코도 둔해지고 라운딩도 좁아지며 어떤 때는 라운딩도 잘 안 하는 게으름을 피울 무렵, 내가 "루키"라고 이름 지은 명견(부리타니 스파니엘: Brittany Spaniel) 을 만나게 되어 일선에서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수색, 운반, 예비 포인, 본 포인, 수중운반 등은 물론, 주인 말을 알아듣고, 지시에 따라 꿩을 몰아다 주는 개는 또 자기보다도 훨씬 더 큰 노루(대작)도 주인 앞으로 몰아다 주는 개는 아마도 만나기가 힘들 것이다. 다만 선불 꿩(총에 맞아 날개만 부러진 꿩)회수는 너무 겁이 많아 70%밖에 못한 것이 흠 일지는 몰 도.....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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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포 박이 만난 명견들 1984년~1993년 (2) (2) 케미 : 1984년 초(혹시 83년 말?)에 태어난 듯. 숫 놈, 전형적인 잉글리쉬 세타 (English setter) 흰 바탕에 검은 점 1982년 갑자기 수렵이 풀렸다. 10년 동안 그 긴 세월의 금렵(禁獵)이. 강원도 일원에. 하루에 장끼 2마리. 별안간 해제(解濟)가 되고 보니 조렵견(鳥獵犬: 꿩이나 비둘기 같은 새를 사냥하는 개)들은 금렵기간 동안 다 늙어 죽어 사냥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첫해에는 하루에 꿩 2마리가 무어냐고 사냥을 포기하다가 다음해 서부총포 (고 박등용 선배엽사 운 영)를 들렸다가 사냥 무용담에 홀딱 빠지게 되어 다음해(1983년) 경남 사냥할 때 동생과 같이 시작을 하게 되었다. 사냥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길이 없었다. 마침 함양에 사는 포수가 포인터를 갖고 있다 하여 득달같이 아내와 같이 내려가 보니 잡종 포인 터(pointer)인데 그것도 뒷다리를 저는 숫놈이 5살 이상은 되어 보였다. 시험해 보니 겨우 포인(pointing)과 운반은 하는데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원래 조렵견(鳥獵犬) 이 귀했으므로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 수없이 손에 넣었다. 그 개 이름은 촌스럽게도 "쫑". 게다가 개 실력에 비해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경남 사냥은 그 개를 가지고 그럭저럭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 5월 하순 한 동네에 사는 낚시선배 박정산 사장께서 자기 개가 집을 나가 문을 열어 놓았더니 자기 개는 들어오지 않고 엉뚱한 사냥개 같은 것이 들어왔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나가지도 않고 또 끌 고 다니며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주인이 나타나질 않으니 개 감정이나 해 보란다. 한눈에 6~7개월 밖에 안 된 잘 생긴 세타(setter)가 나를 반기며 꼬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너무 탐이 나서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나에게 양보하라니 단번에 "No!"다. 자기도 사냥을 하고 싶다나..... 아무리 설득해도 막무가내다. 그리고 한 보름이 흘렀다. 느닷없이 개를 빨리 가져가란다. 마나님 고급 구두와 자기가 아끼는 신발을 모두 물어뜯어 작살을 내, 마나님한테 꾸지람도 많이 듣고 자기도 속이 무척 상했나 보다. 이름을 "케미"라 지었으니 가을에 꿩이나 잡거든 한 마리 보내란다. 마음이 변할까 봐 잽싸게 갈비 한 짝을 선사하고 개를 데리고 왔다. 이렇게도 우습게 "케미"와 인연이 되었다. 그로부터 5개월 동안 내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이 "케미"는 겁도 많고 아주 순했다. 따라서 운반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고, 겁을 없애기 위해 다른 개와 많이 부딪힐 수 있게 했고, 부지런히 필드(field: 야외)훈련을 시켰다. 필드에 나가니 너무 겁이 많아 도랑도 잘 못 건너질 않나, 작은 언덕도 못 내려와 애를 많이 먹었다. "케미"혼자는 안 되겠기에 "쫑"과 같이 훈련을 시키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 훈련은 리드 견(leading dog: 선도견)이 시킨다"는 말을 그 때서야 깨달았다. 그해 처음 출렵(出獵: 사냥 가기)을 했는데 아직 사냥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쫑"만 졸졸 따라 다니더니 세주 째는 "쫑"이 그냥 지나쳤는데도, 어! "케미"가 포인(pointing)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멍청히 서있지 않는가? "야! 니 형이 그냥 지나갔는데 뭐 하고 있는 거야?" "들어 가 봐!"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놈이 웃기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발로 개를 "툭" 미니까, "후다닥!" 덮치는데 까투리란 놈이 포드등!" 하며 날지 않는가? 어! 요놈 봐라! 맹랑하네. 그 날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당해 아예 4주부터는 아예 "쫑"은 집에 두고 "케미"만 끌었다. ("쫑"은 나 이 많으신 엽사가 달라고 하셔서 양도했음) 다음 번 출렵하고 보니 포인이 정확했다. 그런데 꿩이 떨어지면 쫓아가서 물어도 보고 발로 건드려 보기는 해도 워낙 겁이 많아서 물고오지 않았다. 다시 집에서 새끼(지푸라기)를 꿩 크기만큼 감고 그 위에 꿩 날개와 꼬리를 덧붙여 운반을 시키니 처 음에는 망설이다 곧잘 물어왔다. 이젠 되었다 싶어 사냥을 나가 보면 또 운반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첫해를 다 보냈다. 이듬해 노한성 선배님과 공렵(共獵: 사냥을 함께 하는 것)을 하는데 우리 개 "케미"가 꿩을 물려고 할 때 노 선배님 개가 쫓아가 빼앗으려고 하니 얼른 물어 나에게로 가져왔다. 두세 번을 그런 식으로 하였더니 운반은 완벽하게 마스터 되었다. 그러나 워낙 겁이 많아 선불 꿩(하우찌: 총에 맞아 날개만 부러진 꿩) 회수 때 전력 질주하여 따라가다 꿩이 꿇으면 포인을 하고 있는 바람에 선불 꿩 회수는 2년차가 끝날 때 까지도 반반이었다. 따라서 꿩이 부상당해 기어 도망가면 나도 같이 따라가 응원을 해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3년차부터는 수색을 하다 일단 꿩 냄새가 나면 예비 포인을 해주는데 한 번 포인하고, 한 번은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을 내가 자기한테 따라 붙을 때 까지 반복하는 것이었다. 여기 꿩이 있으니 빨리 오라는 신호다. 즉시 내가 따라붙으면 자기도 살살 기어가 정식으로 포인을 해주었다. 또 덮치는 데도 꿩이 안 일어나면 반경 15~20m로 라운딩(rounding)을 하여 꿩이 못 도망가게 만들어 놓고 다시 수색, 포인하여 날려 주니 미리 날리는 법이 거의 없었다. 또 4년차 반부터는 밭에서 놀다 산으로 올라간 꿩을 추적할 때 내가 휘파람을 불며 손으로 신호를 보 내면 다음 골짜기로 몰아 내 앞으로 보내 주곤 했다. 1989년 충남 봄 사냥 때 박기겸 선배님이 가지고 계셨던 대형 잉글리쉬 포인터(English pointer) "파피"와 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신당 총포에 이 두 개가 쌍벽을 이루고 있어 회원들의 관심이 컸다. "파피"는 신당총포 사장이신 고 김건철씨께서 직접 훈련을 시키셨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출렵을 했 으니 기세가 등등했다. 다만 나이가 만 3살 밖에 안 되었음으로 많은 경험이 없을 터, 나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케미"가 6살이어서 진다면 호되게 창피를 당할 터라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견주(犬主: 개 주인)가 다 같이 공렵을 하기로 하고 총무인 김동수군(고 김건철씨 큰 아들)이 심판관 으로 나섰다. 첫번 라운드는 우리 개 "케미"의 승리로 끝났다. 아주 큰 고추밭에서 우리 개가 예비 포인을 하는데도 "파피"는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우리 개가 조금 추적하다 보니 너무 많은 기척이 있어서인지 장선생이 "꺼거겅!"하고 25m 앞에서 미리 뜨는 것이었다. 둘은 자기 개만 믿고 "어깨 총"을 하고 있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고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니 보라는 듯이 한 방에 "탕!", 명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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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포 박이 만난 명견(名犬)들 1969년~1972년 (1) 땡포 박이 직접 훈련을 시켜 주위 선배 엽사님(獵師:사냥꾼)께 "과연 명견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개 들이 세 마리나 있다. 나는 원래 돈복은 타고 나지 못했지만 엽견(獵犬: 사냥개) 복은 타고났다고 자부한다. 혈통도 없는 엉터리 개일지 모르지만 어떻든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개들이다. 이 세 마리는 다 보통 때는 아주 순하고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실렵에 들어가면 눈빛이 형형하고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개들은 하나하나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서 과연 어떠한 개였던가를 살펴볼까 한다. (1) 케리 : 1969년 3월 생(암), 잉글리쉬 포인터(English pointer: 암컷, 쵸코렛 반점)와 잉글리쉬 세터(English setter: 숫컷, 오랜지 색 반점)의 1대 혼합 견 1967년 선친께서는 명견 "럭키"가 나이를 먹고 또 불질(총질의 옛말)을 잘못하셔서 인지 개가 빠르고 멋대로 수사하는 것이 싫으셔 수원 포수한테 거금 \50,000원(그 당시 구하기 힘든 벨기에 부라우닝 오토 5G 신품 값이었음)의 거금을 주시고 "자니"라는 위에 말한 잉글리쉬 포인터(암)를 사 오셨다. 그런데 너무 찬찬해서 돈 만큼 잘 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선친께 신세를 진 어느 사냥꾼이 혈통이 좋은 견이라고 잉글리쉬 세타를 보내 왔다. 그러나 이 개가 워낙 겁이 많아 총소리만 들으면 도망을 치는데 사냥하러 갔었다가 늘 개 찾느라고 헤매게 되니 빛 좋은 개살구가 된 셈이다. 지금같이 사격장이나 있었으면 고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으며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집에다 묶어 놓을 수밖에..... 그런데 "자니"가 새끼를 갖고 싶은지 자기 개 줄을 끊고 그 세타와 신방을 꾸려 1969년 3월에 6마 리를 낳았는데 이상한 강아지들이 태어 난 것이다. 온통 하얀 바탕, 짧은 털에 작은 오렌지 점만 무수히 박힌 그야말로 똥개 같은 종자가 나왔다. 2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4마리 가운데 2마리는 동료엽사에게 주시고 2마리는 9월경 경기도 여주 이포에 사는 조포수란 사람에게 맡겨 코를 뚫어서(포인:pointing을 할 정도로) 한 마리만 달라고 부탁 하셨다. 한 달도 안 되어 포인은 한다고 가지고 왔는데 사람도 먹기 힘든 때라 더군다나 시골에서 어찌나 못 먹였는지 너무 말라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나 있어 개는 작지, 보잘 것 없는 그야말로 똥개만도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또 6개월 밖에 안된 개가 포인을 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옛날에는 1년 이내에 포인만 하면 명 견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음). 그 때는 사냥개를 잘 모를 때지만 왕초보인 내 눈에도 어찌나 한심하던지..... 한편으론 못 먹여 무척 마른 게 너무도 측은하였다. 그러나 좀 다루어 보니 무척 영리했고 얌전하였다. 실렵(實獵:실제 사냥)을 나가서 보니 7개월짜리가 포인(pointing)은 정확했다. 다만 결점은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꿩만 물으면 즉석에서 뜯어 먹는 것이었다. 꿩을 뺏으려고 하면 결사적이었다.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어서 절대로 때리지 않고 달래고 평소에 잘 먹였다. 그런데 집안 마당에서는 무엇을 던져도 운반은 하는데 꿩만은 달랐다. 한해 엽기를 보내고 7개월 내내 잘 먹이며 꾸준한 운반 훈련을 시키고 사랑을 듬뿍 주었다. 드디어 다음해 사냥철이 왔다. 그 날 선친을 모시고 선친 친구 두 분과 공렵(共獵)을 했다. 내가 꿩을 떨어뜨리자 역시 지난해와 똑같이 꿩을 물어뜯는 것이 아닌가? 이때 선친 친구분 최경록 회장님께서 소리를 치시며 꿩을 뺏으려는 시늉을 하자 이내 물고 나한테로 도망치듯 올 때 오징어 조각을 주니 꿩을 턱 놓고 그 오징어를 먹는 것이었다(개와 오징어가 상극인 줄은 1980년대 후반에야 알았다). 이렇게 두어 번 하니 워낙 개가 영리한지라 그 다음부터는 꿩을 물고와 내 앞에 놓고 뭐 줄게 없느냐 고 쳐다보면 항상 준비해온 오징어나 건빵을 먹였더니 운반은 철저하게 마스터한 셈이었다. 또 2살이 지나고 부터 선불 꿩도 곧잘 회수하여 거의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개가 되었다. 다만 옷을 잘못 입은 것을 빼고는..... 3년차에는 점점 익숙해져 포인하는 모습도 달랐다. 얼마나 후각이 예민한지 내가 자기한테 따라 붙을 때까지 포인하고 있다 가 꿩이 기는 방향으로 자기 도 살~살기면서 항상 꿩이 있는 방향으로 포인해 주며 또 포인 자세도 꿩이 정면에 있을 때는 똑바로, 왼편에 있을 때는 왼쪽으로, 오른편엔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서, 각도를 정확히 가르쳐 주었다. 내가 꿩을 보지 못해도 어디쯤 숨어 있을지 짐작할 수 있어 방향 잡기가 수월해 명중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 꿩이 기면 기는 속도로 자기도 따라 엎드려 살살 기면서 추적하고, 나르려고 빨리 기면 자기도 속 를 빨리 해 따라가므로 내가 미리 "들어가!" 명령을 내리면 날려 주었다. 떼 꿩을 포인할 때는 일어서서 포인을 해주어 3년차 해에 꿩을 185마리나(거의 주말 사냥으로) 잡게 해주는 명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73년부터 금렵이 시작되어 애견 "케리"와는 더 이상 사냥을 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조렵견(鳥獵犬:새만 잡는 개)은 5~7살 때가 가장 피크인데 4살도 안되어 끝났으니 이렇 게 아깝고 한심스러울 수가..... 그 후 "케리"가 5살 되던 무렵 장손인 나는 8년 동안 부모님 모시고 살다가 분가를 하게 되어 이별 하고 말았다. 선친께서는 금렵이 풀릴 날만 기다리시다 "케리"가 너무 아까워 8살 때 새끼를 받으시려다 난산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지금도 동료 엽사(獵士)인 아내에게 너무도 명견이었던(겨우 3살에) 그 "케리" 얘기를 하면 여태까지 귀에 못 박힐 만큼 들었으니 그만 얘기하라고 핀잔을 듣는다. 그래도 선불이 되어 도망가는 꿩을 떨어진 자리만 가르쳐 주면 꿩은 안 보이는데도 냄새로 전력 질주 를 하며 따라가다 또 물로 지나가 냄새가 안 나면 라운딩(rounding), 또 라운딩 해 기어이 물어오는 광경을 산 위에서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개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요사이도 가끔 사냥하다 지쳐 앉아 있노라면 그 "케리"가 내 옆에서 얌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옛날의 그 "케리"가 그리워서 말이다. 지금 개가 잘 못하면 옛날의 명견이었던 개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없는 일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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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로 꿩 두 마리를 잡은 이야기 1991년 2월 14~16일 구정(舊正) 연휴에 우리 내외, 동생 박병우 원장, 노한성 선배님과 같이 경남 진양군(지금은 진주시) 문산면으로 출렵(出獵)을 했다. 옛날에는 구정을 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은 늘 신정(新正)에 차례를 지냈고 구정이 공휴일로 지 정되어 구정으로 옮기려 하니 조상님들께서 혼동하신다고 그대로 지내라는 어머님의 엄명(? 嚴命) 때 문에 지금도 신정에 차례를 지낸다. 이제는 두 분 다 계시지 않지만..... 이틀 동안은 너무 비가 많이 내려 잠깐씩 사냥을 했지만 별 소득이 없어 소주만 죽이다가 마지막 날 16일에는 쾌청하여 사냥 길에 나섰다. 그 동안 사냥 2년 선배인 동생과 다소 의견 차이가 있어 2마리밖에 못 잡아 오늘은 우리 내외 한조, 동생과 노 선배님이 한조로 찢어져 사냥하기로 해 두 번이나 사냥을 했었던 문산면 마을 근처로 갔다. 그런데 이곳은 마을 건너 오른쪽에 자그마한 계곡이 있고, 계곡 중턱에 덤불이 우거져 있어 아늑하고, 그 밑에 밭에는 먹을 것도 풍부하며 또 양달과 음달이 다 갖추어 있는 것이 꿩 붙기가 아주 좋은 명당 중에 명당이었다. 그런데도 두 번씩 찾았었으나 늘 헛 탕이었다. 이틀 내리 비가 와서 사람 왕래도 없었을 터인즉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았다. "어~라! 이게 웬일?" 예상한대로 장끼란 녀석이 그것도 묵디 묵은 도사님께서 미리 도망가지 못해 놀랐는지 "꺼겅! 껑!껑!" 소리를 지르면서 그 덤불에서 미리 날라 왼쪽으로 일직선 수평으로 날아간다. 오른 손잡이가 가장 쏘기 좋아 하는 코스. 천천히 총을 들어 리드하면서 "탕!" 멋있게 곤두박질 치니, 애견 케미는 곧장 달려 가 회수. 어? 아내는 그 오른 쪽 20m에 한 마리가 또 떨어졌단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유탄에 맞았을 리는 없고 정말 떨어졌다는 지점에 꿩 털이 빠져 있는 것을 본 순 간, 옛날 금렵 전(1972년 전)에 당했던 꿩 생각이 났다. 그 때도 왼쪽 꿩을 쏘았지만 그 놈은 날아가 버렸는데도 동시에 오른쪽 다른 꿩이 떨어지는 것을 본적 이 있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정말 정통으로 총에 맞아 떨어지는 꿩같이 땅바닥에 바운드(bound)가 되면서 축 늘어진 모습이 영락없이 꼭 죽은 꿩이었다. 그런데 웬걸? 도랑을 건너가 보니 온데 간데가 없었다. 건너가는 사이에 기어 내뺐던 것이다. 개를 불러 따라가니 욘석이 전력 질주(跌走), 산을 넘자마자 끝 턱에서 날라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아주 약디 약은 꿩은 자기가 계속 더 날면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런 경험이 있어 그 즉시 애견 "케미"를 불렀다. 조금 긴장이 되어 언제 날지 몰라 "앞에 총"을 하고 개를 따라 부지런히 쫓아갔다. 냄새를 달고 5~60m 를 지그잭으로 추적하더니 아주 작은 계곡 위에 땔 나무를 말리려고 잔뜩 쌓아 놓은 입구에다 포인(pointing)을 하지 않는가? "케미! 들어가!" 케미가 쳐 들어가자 그 속에서 "후다닥! 후드드닥!" 하더니만 이내 꿩이 "끽- 끽-"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옳지!" "케미"가 물었구나! "야! 케미! 가지고 나와!" 케미가 의기양양하여 물고 나오니 사냥 20년만에 생전 처음 1발로 2마리를 잡은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1彈 2雉를 해 본적이 없다. 꿩이 제 아무리 약다 하나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당할 수 있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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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정포수가 첫 꿩을 잡은 이야기 1990년 11월 4일 아내 정 포수는 첫 출렵(出獵)을 하여 꿩을 보고 두어 번 쏘아 보았으나 막내아들 재하의 대학 입시준비 때문에 연말까지 포기하다 시험이 끝난 후 다음해 1월 9일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다음 글은 아내 정 포수가 첫 꿩을 잡을 때까지의 나의 수렵일기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1991년 1월 9일 ( 맑음 ) 경남 진양군(진주시) 문산면 서포리 아내 정 포수와 둘이서 오붓하게 하루를 즐길 것이라던 기대로 마음 부풀었으나 꿩 수획(收獲)이 여 의치 못하자 또 발동이 걸리게 되었다. 천천히 재미있게 사냥하자던 것이 꿩 만나기가 어려워지니 점점 빨라져 오래간만에 나온 아내 정포 (정영옥포수의 애칭)는 따라오기가 힘들었다. 한, 두 마리 잡으면 그만이지 하다가도 한 마리라도 더 잡아서 잡지 못한 선배님들께 나누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래도 아내 정포는 내가 빼먹는 꿩을 두 발씩 연달아 쏘는 것을 보면 순발력이 보통이 아니다. 비록 군대에도 갔다 오지 않은 여성이지만 사냥꾼 소질이 꽤 있어 보였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양지에서 두 내외가 다정하게 마주 앉아 떡라면을 끓여 서로 반주도 권하면서 아 이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 하면서 먹은 점심은 정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이었고 정 겨운 삶, 그 자체였다. 오늘은 애견 "케미(잉글리쉬 세타)"의 명견다운 행동에 우리 둘은 너무 기뻐 찬사를 보냈다. "케미"덕분에 오늘은 장끼 4마리. 빨리 아내가 잡아야 될 텐데..... 1991년 1월 23일(안개 후 맑음) 진양군 (요즘은 진주시) 문산면 (문산읍)
너무도 멋지고 즐거운 사냥 길이었다. 여지껏 그 많고 많은 엽행 중에 이렇듯 흥분되고, 재미있고, 기분이 좋은 사냥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사랑하는 아내 정영옥 포수가 첫 수획을 한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씩 이나..... 물론 꿩도 많이 만났지만 아내 정포와 호흡이 척척 맞는 것도 처음이요, 애견 "케미"도 이젠 나이가 먹어서인지(8살) 덤비지 않고 차근차근하게 수사를 해 주지 않나, 떨어트린 꿩은 다 물어왔고 더군다 나 아내가 2마리를 잡은 것은 너무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첫 수획은 애견 "케미"가 멀리서 예비 포인(포인은 point의 준말: 꿩이 있는 곳을 알게 해 주는 자세) 을 하기에 부지런히 뛰어 가다 보니 20m 앞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이내 방향을 틀어 오른쪽 아내 방향으로 나가는데, 좀 늦으면 아내 때문에 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급 히 "탕! 탕!" 두 발을 쏘는데 그냥 간다. 이때 아내 정포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탕!" 깨끗하게 한발에 명중. 그것도 묵은 장끼를..... 바로 다음에 또 애견 "케미"가 예비 포인을 한다. 뛰어가 따라 붙으니 정식으로 포인! 아내 정포도 부지런히 따라 온다. "들어가!" 인석이 너무 겁이 많아 안 들어간다. 발로 풀뿌리를 툭 차니, 개가 뛰어 들어가자마자 "꺼겅! 껑껑!" 큰소리를 내며 솟아오르는데, 내가 먼저 "탕!" 이상하다. 오늘은 내가 왜 이리 빨리 쏘지? 내 첫 발이 미스 되자 이내 아내 정포수 총구가 불을 뿜더니, "털~석!"하고 정통으로 떨어졌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이나! 그것도 첫 꿩을 잡는데..... 그야말로 아내 정포는 명포수가 되고 나는 땡포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내가 땡포수란 이 입에 붙었나 보다?) 그래도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황홀한 순간이었던가? 아내 정포는 "여보! 당신도 쐈죠?" "아니! 처음엔 두발 쏘고도 못 잡고 다음 건 첫 방엔 놓쳐서 다시 쏘려고 하는데 떨어지데..." 아내 정포는 덤덤하게 자기 자신이 영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허!허! 이젠 제법이셔...!" 아내 정포도 기분이 좋은 듯 수줍게 웃고만 있었다. 마치 "당신이 잡을 꿩을 내가 잡아서 미안하다"는 듯이..... 내가 5마리를 보태 합이 7마리!
귀가(歸家) 버스에 오르니 야단법석이다. 연로하신 선배 엽사님들께서 아내 정포가 잡은 꿩을 서로 가지시겠다고(아내가 양보를 한다면) 경쟁 이 붙어 맨 처음 맥주를 사시는 순서라니까 서로 사시겠단다. 하는 수없이 가장 연장이신 이 원장님, 그리고 박명성 원로선배님께 드렸다.(두 분 다 고인이 되셨다.) 물론 내 것도 한 마리 더 내놓았다. 다음에도 또 잡아 나누어 달라고 큰 박수와 함께 건배를 받은 아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갛게 물 면서 계면적어 하는데, 왜 내가 그리 우쭐거려지던지..... 아내 정포수가 늘 이렇게 잡기만 한다면 난 땡포수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내 덕분에 얻은 캔 맥주를 "벌~컥! 벌~얼컥!" 시원하게 들이키니 마음이 또한 뿌~듯~ 했다. 정말로 흥겹고, 기분 좋고, 날라 오를 듯한,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정영옥 포수 Fighting!!!!! ( 끝 ) (후기) 아내 정 포수는 지난번(2004년도) 영광군에서도 첫 날 두 마리를 잡는 등 1년에 적어도 7~10마리 이상을 잡곤 했다. 그런데 지난번 함평에서는 2마리밖에 잡질 못했다. 물론 폭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 두 내외는 잡던 못 잡던 부지런히 산과 들을 누빈다. 아내가 너무도 잘 걷고 부지런히 잘 따라 다니기 때문에 난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두 내외는 늙을 틈이 없나 보다. 아직까지 제 이에(치아) 머리 염색을 한 번도 한 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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