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과정이 거의 끝나가던 84년 봄에 모교인 경북대학교에 유전공학과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 생물학을 공부하러 유학 오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유전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이야기들을 했었으나 당시에는 유전공학이란 말이 퍽 낮 설게 들렸었다. 박사논문 주제로 뿌리혹박테리아의 rRNA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했었는데 그곳 일리노이주에서는 콩의 자연비료인 뿌리혹박테리아가 중요한 미생물이어서 연구가 많이 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귀국해서는 논에 서식하는 광합성세균에 대한 연구를 할 생각을 했었다.
토양미생물과 유기농업에 관심이 많았음으로 개 특히 삽살개 연구를 하게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85년 봄 모교의 유전공학과에 부임하게 되었다. 32세에 대학교수가 되어 어떤 연구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당시 유전공학은 한해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분야들이 열리는 마치 유전공학의 서부 개척시대와 같은 때였다.
그런데 85년 아버님 목장에서 다시 만난 삽살개는 안스러움 그 자체였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목장 여기 저기에 묶여 있었는데 신선한 물도 제대로 먹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일평생 벗을 수도 없는 그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 쓴 채 헐떡거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멸종 될 것 같았지만, 사실 보존 노력을 바로 시작하지는 못 했었다. 주 전공이 아닌 개 관련 일을 할 생각이 당시에는 전혀 없었고 또,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삽살개를 기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 있는 삽살개는 거의 없다는 것과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 이 여덟 마리가 문익점의 목화씨앗 3알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목화 씨앗 세 알=삽살개 여덟 마리라는 등식이 내 마음을 움직인 가장 큰 동력이었다. 당연히 살려내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논 토양의 질소비료인 광합성세균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도 연구 될 수 있을 터였다.
유전학자 입장에서 볼 때 개 좋아하는 성품은 유전되는 것 같다. 멘델 방식과는 좀 다르지만 집안에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이 여럿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촌 두 분이 계셨는데 쇠고기 국이 아침 밥상에 올라오면 언제나 밥상에서 고기국만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나의 유별난 애견 성향이 삼촌들 닮았다고 부모님께서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님이 경영하시던 목장이 넓은 관계로 집에는 언제나 20여 마리의 개들이 있었다. 사나운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풀어서 길렀는데 내가 휘파람만 불면 10여 마리의 개들이 몰려오곤 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던 동안 나는 학교에서 제일가는 지각대장이었다. 아침에 학교 갈려고 하면 의례 내 신발은 사라지고 없었고, 당시에는 한 켤레의 신발이 다 닳을 때까지는 새 신발 구경을 못하던 시대였음으로 당연히 신발 찾을 때까지는 학교 갈 수가 없었다. 신발 찾다가 개집에 들어가서 개들과 놀다 보면 담임선생님 인상 쓰시던 모습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었다.
여늬 철없는 고등학생들처럼 장래에 대한 계획도, 야심도 없이 그냥 넓은 목장에서 개들과 어울려 놀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집안에 의사가 많아서 별 생각 없이 경북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고 제 2 지망으로 농화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농화학과 에서 걸음 거리부터 흉내낼만한 훌륭한 학자 두 분을 만난 것은 나에겐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공부하는 것이 어떤 건지,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철이 들면서 개와는 자연 멀어 졌고 나중에는 미생물유전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미국 유학까지 가게되었다. 미국으로 떠날 때 목장 집에는 15마리 가량의 삽살개가 있었다.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아버님의 대학원학생으로 목장에서 같이 지내게된 탁 연빈 교수와 나와의 인연은 어쩌면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탁 교수님은 교수가 되신 뒤에도 같은 동네의 가까운 곳에서 사셨는데, 1960년대 말 과학기술처 연구비로 삽살개에 관한 연구를 하시면서 멸종직전의 삽살개 30마리를 수집했었다. 시골 각지에서 개업하고 있는 동료 수의사들의 정보망 덕분에 그나마 찾게된 이 삽살개들이 20여 년 후 지도교수의 아들에 의해 천연기념물이 되고 또 소중한 동물자원으로 보호받게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시면서...
아버님에게 삽살개 보존과 육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흔쾌히 모든 도움을 허락하셨다. 정년 퇴직을 앞둔 마지막 교수 시절에 아버님이 보여주신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손수 개집 울타리를 치시고 즐거워 하시기 까지 하셨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아들이 하려 하니 고맙고 기쁜 일 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아버님은 토종동물 보존의 중요성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강의 중에 강조 하셨지만, 과거 영국 같은 나라의 귀족들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시고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넓은 장원에 많은 일꾼이 있고 수 십 년 돈 걱정 없이 동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많은 동물들이 영국 귀족들에 의해 개량되어 왔는데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아들과 손자가 계승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동물품종들을 만들어온 육종의 천국이 영국인 것이다. 다소 고지식하시기도 한 아버님은 6남매를 대학공부 시키시기 위해 교수를 하시면서 소와 돼지를 기르신 것만으로도 당신의 소임을 다 하신 것으로 생각 하셨든 참이었다.
철망울타리를 치고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초창기 보존사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거의 전부였었다. 소 관리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밥과 물을 신경 써서 주도록 하고 강아지들이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숫자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는데 주위 여건이 워낙 나쁜 탓에 강아지들의 폐사율이 대단히 높았다. 목장부지가 강변 저지대이므로 여름철에는 습하고 겨울철에는 강바람이 강했으며 소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폐기물들로 인해 파리와 모기가 창궐했고 그래서 애써 마련한 개집들은 온갖 질병의 온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늙은 청삽살개가 낳은 6마리 강아지 중에서 암 강아지 한 마리만 살리고 모두 죽어 버리기도 했는데 늙은 엄마 개는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했고 이 한 마리 살아남은 암 강아지가 삽살개 집단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조상이 되기도 했다. 일년만 늦게 돌아 왔거나 시작이 조금만 늦었어도 어쩌면 보존사업이 무위로 끝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에 아버님과 함께 개집을 짓는 한편, 시간을 내어 다른 삽살개가 혹시 살아 있을까 하여 찾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는 분들에게 삽살개 강아지를 나누어주었다고 해서 청도로 대전으로 여기 저기 찾아 다녔다. 청도 에서 기르던 삽살개는 덩치가 큰 청삽살개 였었는데 옆집에서 기르던 싸움개 일본 도사와 여러 번 싸운 끝에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대전에 주었던 개는 지난 복날 잡아 먹혔으며, 나누어주었던 다른 개들 대부분이 사라져 버려서 실망 만 안고 돌아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구 칠성동에 개 시장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부탁해서 사진처럼 생긴 개를 발견하면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목장에서 삽살개를 구경 한 적이 있는 전공이 비슷한 교수 한 명과 같이 동행을 했었는데 이 의리 없는 분이 이집 저집 다니면서 만일 자기에게 먼저 연락해 주면 값을 두 배로 쳐서주겠다고 소문내고 다니기 까지 했다. 돈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던 이분도 결국 구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88년이 되면서 개는 조금 늘어나서 30마리 가량 되었다. 주말이면 의례 농장에 갔으며 사료 값이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는데, 전담관리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진돗개처럼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으면 국비 지원으로 잘 운영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부터 자료수집과 개에 대한 기록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개집에 번호 판을 부착하고 가계도를 그리기 시작했으나 전공은 여전히 미생물유전학이었다.
그러나 큰 개 한 마리라도 집에서 길러본 사람이라면 수십 마리로 불어난 삽살개 집단을 개인이 유지한다는 것이 어떨 것이란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만 나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어김없이 개 보러 달려가는 사람이 세상에 우리 아빠 뿐 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 아이들이 이제 많이 자라서 이해는 해 주지만 돌이켜 보면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목장이 강변에 있는 관계로 큰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이면 좋은 개부터 여러 마리씩 승용차 뒷 트렁크에 싣고서 비 피해가 적은 고지대로 옮기곤 하였다. 온몸에 개 배설물을 뒤집어 쓴 채 폭우 속에서 싸우는 개들을 뜯어말리고, 밤새 차안에서 새우잠 자며 지키던 그 많은 날들도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는 미소로 떠올릴 수 있는 과거의 기억들이 되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이런 반미치광이 같은 일들을 하면서도 자료 수집을 통해 애견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진정한 우리 토종개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일본은 일본인들에 의해 보존되어 품종으로 고정된 일본개가 열 종류 이상이나 되는데 비해, 우리는 일본인 모리 교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진돗개를 제외하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오천 년 문화민족임을 자처하는 우리지만 적어도 토종동물보호에서만은 후진국 티벳 만도 못한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었다. 만일 삽살개를 하나의 품종으로 살려내기만 한다면 30년 후 정년퇴직 할 때쯤에는 대동여지도 정도의 가치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 아니라도 연구할 사람이 많은 미생물은 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89년 봄 어느 날,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해서 천연기념물 지정신청서를 작성한 후, 문화재관리국을 찾았다. 이름 없는 삼십대 중반 시골교수의 주장은 노회한 담당서기관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 같았다. 담당과장과 말다툼만 하다가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생각한 것이 연구의 필요성이었다. 연구논문이 있고 학계에서 인정받는다면 구태어 담당공무원들과 싸울 필요가 없을 터인데 뭔가 접근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단 천연기념물 지정은 잠시 접어두고, 삽살개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연구비 신청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하여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1990년부터 과기처 지원의 목적기초연구를 수행하게되었는데, 탁교수님을 연구책임자로 모시고 4명의 교수가 공동연구팀을 구성하였다. 삽살개의 외적형태, 혈액단백질, 유전자, 질병저항성에 대한 연구가 추진되면서 91년부터는 논문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파구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열렸다. 지금은 대학 4학년이 된 큰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KBS의 꾀꼬리 노래시합에 나가고 싶어했다. TV를 보면서 연습을 했다 길래 오디션에 데리고 갔는데, 너무 어리다고 기회도 주지 않고 실격 시켜서 애가 크게 실망스러워했다. 담당 PD를 만나서 항의했더니 다음 번에 오면 기회를 주겠다 했고, 기회는 상으로 연결되었다. 고마운 마음에 점심 식사 초대를 했는데 식사 중 삽살개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 후 호의를 베풀었던 PD는 한시간 짜리 삽살개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연말에 방송국으로부터 큰상을 받았으며, 91년 한글날 방영된“ 삽살개를 아시나요“ 라는 그 프로는 문화재관리국의 마음을 확실히 움직여 놓았다. 그 해 11월에 문화재전문위원 몇 분과 담당사무관이 농장을 방문 할 때쯤에는 여러 편의 논문과 혈통기록에 대한 상당한 자료가 이미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92년 3월의 삽살개 천연기념물 지정 발표는 애견계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공식적인 한국개가 진돗개 한 품종만 있는 상황에서 50여 년 만에 나타나서 적자임을 주장하니 설왕설래 말이 많은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 이었을 것이다. 문화재위원회 통과 후, 정식 발표가 있기 전인 92년 초 국내 주요 애견단체들로부터 삽살개만은 임의로 가짜 혈통서를 발행하지 않겠노라는 서류에 미리 도장을 받아 놓았었다.
그러나 삽살개에 대한 애견가들의 관심이 커지고,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갑자기 자칭 전문가가 출현하고 애견단체들은 엉터리 혈통서를 발행하였으며 털긴 개 품귀현상 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털만 길면 어떤 개든지 삽살개가 된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관행대로 혈통서만 첨부하면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참동안 혼란스런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나중에는 하교수 몰래 훔쳐 내온 개의 일대자손이라면서 팔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나의 품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4-5대의 혈통기록이 있어야 하며, 체계적인 육종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당시 삽살개들은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 였었다. 어디까지나 습작품이지 낙관 찍어 팔 수 있는 완제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싼 가격만 지불하면 당연히 팔 줄 알고 찾아온 개 상인들에게 절대 개를 팔지 않는 하교수의 행동은 독점하여 값 올릴 려는 상술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유언비어가 나돈다 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돈 이외 다른 동기로 인해 움직이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그들에게는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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